속도를 늦추는 첫걸음
현대인은 ‘빠름’에 중독되어 있다. 빠른 인터넷, 빠른 배달, 빠른 대화. 나 역시 늘 효율과 속도를 추구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속도가 빠른데도 불구하고 마음은 더 조급해지고, 하루가 금세 지나버려 남는 것이 없다는 공허감이 커졌다. 그래서 하루 동안 ‘속도를 줄이는 실험’을 하기로 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시작했다. 보통은 알람이 울리면 부리나케 일어나 세수와 아침 식사를 대충 마친 뒤 바로 업무에 뛰어든다. 하지만 이 날은 의도적으로 동작을 늦췄다. 세수를 할 때는 물의 온도를 느끼고, 양치질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했다. 아침 식사에서는 빵을 씹을 때의 바삭거림, 잼의 단맛, 커피의 향을 천천히 음미했다.
속도를 늦추자 당연히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시간은 낭비가 아니라 ‘충만’으로 다가왔다. ‘하루의 시작’을 대충 흘려보내지 않고, 내가 직접 채워 넣는 느낌이었다.
걷기, 먹기, 말하기를 느리게 해보기
🚶 걷기: 발걸음 하나에도 풍경이 달라지다
출근길, 나는 일부러 보폭을 줄이고 천천히 걸었다. 주변 사람들은 다들 빠르게 걸음을 옮겼지만, 나는 뒤처지는 걸 개의치 않았다. 신호등 앞에 멈춰 서 있을 때는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길가의 나무와 꽃들을 관찰했다. 평소엔 스쳐 지나가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발걸음이 늦춰지니 도시가 다른 속도로 보였다.
🍽️ 먹기: 음식이 가진 진짜 맛을 만나다
점심은 혼자 식당에서 먹었다. 보통은 스마트폰을 보며 허겁지겁 식사를 끝내곤 하지만, 이날만큼은 숟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밥 한 숟갈을 오래 씹으며 쌀알이 터지는 식감을 느꼈고, 반찬의 짠맛과 단맛이 입안에서 섞이는 과정을 음미했다. 천천히 먹으니 포만감도 더 빨리 찾아왔고, 과식하지 않게 되었다. 마치 같은 음식인데 새로운 음식을 먹는 듯한 경험이었다.
🗣️ 말하기: 대화가 깊어진다
오후에는 지인과 통화를 했다. 평소라면 빨리 요점만 말하고 끊었을 텐데, 이날은 말하는 속도와 목소리를 의식적으로 늦췄다. 덕분에 대화의 템포가 차분해졌고, 상대방도 마음을 열고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가 단순한 정보 교환이 아니라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는 ‘소통’으로 느껴졌다.
속도를 줄이니 걷기, 먹기, 말하기가 모두 달라졌다. 단순히 동작이 늦어진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경험과 의미가 깊어졌다.
속도를 늦춘 하루가 남긴 깨달음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나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속도를 줄이는 건 게으름이 아니라, 삶을 더 깊이 경험하는 방법이라는 점이다.
첫째, 시간이 길어진다. 이상하게도 천천히 움직였는데 하루가 더 길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다 보면 하루가 휙 지나가 버리지만, 속도를 늦추니 순간순간이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둘째, 마음이 안정된다. 속도가 느려지니 불안과 조급함이 사라졌다. 업무도 몰아서 처리하기보다는 차분히 하나씩 해냈고, 작은 성취에도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셋째, 사소한 것들의 가치를 발견한다. 걷는 길의 하늘, 밥 한 숟가락의 식감, 대화의 여운 같은 일상 속 작은 경험들이 더 깊고 소중하게 다가왔다. 빠른 속도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드러난 것이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늘 느리게만 살 수는 없다. 하지만 하루쯤 속도를 늦추는 실험은 내가 놓치고 있던 삶의 균형을 되찾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앞으로도 일주일에 하루는 ‘속도 줄이기’를 실천해보고 싶다. 삶의 템포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자유를 얻은 셈이니까.
하루 동안 걷기, 먹기, 말하기, 일 처리 속도를 늦추며 나는 ‘시간을 소비하는 사람’에서 ‘시간을 음미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빠름은 편리함을 주지만, 느림은 충만함을 준다. 두 가지는 대립이 아니라 균형을 이뤄야 하는 삶의 리듬이다.
이 작은 실험은 내게 분명히 가르쳐주었다. 빠르게 사는 것이 능사가 아니며, 때로는 천천히 사는 것이 더 깊고 풍요로운 삶을 만든다.